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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그레인.”

 

땅거미가 내리자 지평선이 차츰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렇게 몰려들기 시작한 밤의 한기가 죽음의 요새를 에워싼 차

디찬 안개와 어우러졌다.

 

“모그레인.”

 

그는 냉기에 개의치 않았다. 산 자들이나 냉기를 번거로워할 뿐.

 

“모그레인 대영주,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다리온 모그레인의 두 눈에는 비행 요새 아케루스를 에워싼 안개 너머로 뻗은 부서진 섬이 또렷이 보였다. 수라마르의

은은한 불빛. 지옥의 빛이 사그라지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살게라스의 무덤. 저물어가는 태양의 마지막 햇살을 받

아 주황빛 광채를 발하는 만년설로 뒤덮인 높은산의 아련한 봉우리까지. 그저 적막만이 흘렀다. 군단의 패망 이후 늘 그

런 상태였다.

 

“모그레인, 당신은 아군이 맞습니까?”

 

그의 목덜미로 넌지시 칼날의 압박감이 전해졌다. 손목을 한 번만 움직여도 골칫거리를 없애버리기엔 충분할 터였다. 다

리온 모그레인은 고개를 돌려 검을 쥔 여인과 눈길을 마주쳤다. “당장은 그렇소.” 그가 답했다.

 

“어떻게 장담할 수 있죠?” 샐리 화이트메인이 물었다. 순백의 머리칼 아래로 빛나는 그녀의 눈은 한 치의 미동조차 없었

다. 곁에는 오크와 인간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을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현명한 처사였다.

 

“그야 . . .” 모그레인이 말했다. “지금부터 부탁을 하나 할 거요. 볼바르 폴드라곤 처단을 도와주시오.”

 

모그레인의 머릿속 존재감은 달리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진 않았다. 그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다른 세 사람의

반응이 그의 흥미를 더욱더 동하게 했다.

 

토라스 트롤베인은 인상을 푹 구기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즈그림은 오크어로 욕설을 내뱉곤 땅에 침을 뱉었다. 화이

트메인은 미소와 함께 무기를 내렸다. “잘 됐군요. 리치 왕을 처단하는 게 살아생전 둘도 없는 소원이었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익살스러운 건 여전하구려, 화이트메인.” 트롤베인이 말했다.

 

모그레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은 섬에 닿았고, 마지막으로 평화로운 땅을 감상했다. 평온에 젖는 건 이게 마지막

일 것이다. 이내 그는 등을 돌리곤 심상 속에서 풍경을 차단해, 남은 영혼을 굳세게 단련했다.

 

지금 평온은 그에게 도움이 안 될 테니까.

 

“상의할 게 있소. 우리 4인 기사단끼리만.” 모그레인이 말했다. 그가 오크에게 시선을 보냈다. “나즈그림, 정리를 부탁하

오.”

 

오크는 돌아서서 아케루스의 인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그리마 훈련 교관처럼 으르렁댔다. “해산해라.당장 해산해. 같은

소리를 반복하게 만들면 내 친히-”

 

나즈그림의 호령에 언데드 하수인들은 고분고분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성이 남아있는 자들은 나즈그림의 남다른 명

령법에 익숙해진 뒤였다. 나머지 . . . 즉,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언데드가 되어 부활한 자들, 4인 기사단의 영향력

이 없었더라면 영락없이 아제로스를 휩쓰는 스컬지가 되었을 이들은 일말의 의문 없이 따랐다. 명령의 형태가 고함이 되

었든, 말이 되었든, 단순히 의지에 주입되었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모그레인은 나즈그림이 재미를 보게 두었다. 사령관의 탁자는 창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여 있었다. 그는 검을 뽑

아 들어 탁자에 내려두었다. 칼날에는 생전의 그가 불경스럽게 여겼을 법한 룬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다른 이들 역시 그를 따라 탁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분 후에는 나즈그림도 나타났다. 그의 빛나는 눈은 즐거움으로 번

득이고 있었다. 언데드로 되살아나면서 영혼의 몇몇 부분을 잃긴 했지만, 어쨌든 나즈그림은 여전히 명령을 내리는 위치

라는 점에 늘 감사하는 듯했다. 장군으로서 죽음을 맞은 인물인 만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방에 적막이 흘렀다. 주변에 4인 기사단의 이야기를 엿들을 만한 존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마냥 안전한 건

아니었다. 만에 하나 볼바르가 각자의 정신에 심어둔 존재감으로 전부 들으려 했다면 . . . 막아낼 방도가 없을 것이란 의

구심이 모그레인을 옭아맸다.

 

빌어먹을. 볼바르, 왜직접설명해주지않는거야?

 

모그레인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리치 왕에게서 이렇다 할 기별은 없었소?” 그가 물었

다. 정확히는 존재감을 통해 받았는지 물어보는 말이었다. “명령, 단순 감정 . . . 아무것도 안 느껴졌소?”

 

다른 세 기사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먼저 대답을 꺼내 든 것은 트롤베인이었다. “전혀. 잠시 분노를 느낀 것 같기도 한데,

그 후론 감감무소식이오.”

 

나즈그림와 화이트메인이 맞장구쳤다. 모그레인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에게서 어떤 것이 느껴지오?”

 

“아무것도.” 화이트메인이 말했다.

 

“다시 해보시오.” 모그레인이 말했다. “무엇이든 좋으니 리치 왕의 정신을 찾아 감응해 보시오.”

 

화이트메인은 의아해하는 눈길을 보내곤 눈을 감았다. 곧이어 다른 이들도 따랐다. 세 사람이 집중에 빠져든 후 짧은 시

간이 흘렀다. “여전히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군.” 나즈그림이 말했다.

 

“다들 똑같은 거요?” 모그레인이 물었다. 나머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실을 말하지. 볼바르와 대면했을 때

그는 내 물음에 전혀 답하지 않았소. 왜 우리와 거리를 두는지, 무슨 계획인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히오. 난 분명히 해답을

요구했소. 하다못해 투구의 힘을 계속 견제할 거란 약조라도 해달라고 했지. 한데 거부하더군. 그래서-” 모그레인이 머뭇

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를 공격했소. 시도라는 표현이 더 알맞겠군. 볼바르는 내 의지를 장악하곤 강제로 이곳에 돌려

보냈소. 다 같이 와서 도전하란 투로 얘기하더군. 그는 우리가 섬기기로 맹세한 볼바르가 아니오.”

 

화이트메인의 미소는 오간 데 없었다. 모두의 낯빛이 굳어졌다. 나즈그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 정신을 장악하곤 그

냥 보내줬단 말인가?”

 

“그렇소.” 모그레인이 말했다.

 

“왜 있는 자리에서 자네를 없애 버리지 않고?”

 

“나도 모르오.” 모그레인이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즈그림이 무어라 웅얼댔다. 모그레인은 무슨 소린지 알 턱이 없었다.

 

트롤베인이 건틀릿을 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금속음이 전당에 울려 퍼졌다. “덫일 가능성은?”

 

“모르오.” 모그레인이 말했다.

 

“정말 이상하지 않소, 모그레인?” 트롤베인이 말했다. “볼바르는 우리가 의심하는 걸 알았소. 4인 기사단이 쉽게 위축될

존재들이 아니란 것도 알았지.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우려, 여차하면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걸 실제로 보여줬단 말이

오. 그는 바보가 아니오. 의도적이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군.”

 

화이트메인이 경멸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협박이죠. ‘좋든 싫든 복종하게 될 것이다’라는.”

 

“그럴지도.” 모그레인이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나즈그림이 또 한 번 욕설을 내뱉었다. 이들이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을 거란 건 이미 모그레인이 예상한 바였다. 4

인 기사단은 언데드의 해일을 막아서는 자의 전적인 신임을 받는 부관들이었다. 그러나 모그레인만큼 볼바르 폴드라곤

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없었다. 언데드로 부활하기 전에 볼바르의 얼음 감옥을 직접 목도한 자는 없었으며, 볼바르를

끔찍한 책무에서 해방하고자 수년간 여러 세계를 헤맨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굳건하고 완강한 볼바르 폴드라곤의 영혼이

투구의 말도 안 되는 권능에 짓밟힌 채 서서히 부식되어, 결국 고통이 뒤섞인 무감각하고 단조로운 쉰 소리가 말에 묻어

나오는 지경이 되는 걸 지켜본 사람은 모그레인을 제외하면 없었다.

 

그렇지만 이 다른 이들도 4인 기사단으로 되살아난 순간 모그레인과 같은 우려를 품었다. 아무리 투구에 담긴 진정한 힘

의 극히 일부분만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리치 왕의 힘으로 군단에 맞서겠다는 볼바르의 결정이 영원히 닫을 수 없는 문

을 열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떠오른 것이다.

 

“모두 남다른 의무감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볼바르의 기사단이 되었소. 하지만 가장 큰 죄악을 범할 것을 부탁하려고 하

오. 바로 배신의 죄악을 말이오. 볼바르 폴드라곤을 처단해 주시오. 그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아서가 아니라, 모르기 때

문에 부탁하는 거요. 나는 나 자신에게 약속했소. 볼바르가 자신이 대신한 괴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게 두지 않겠다고.

그래서 설령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행동하려 하오.” 모그레인이 탁자로, 곧이어 그 위에 놓인 검을 가리켰다. “오늘 볼바

르는 내가 그의 지배를 저항하지 못한다는 걸 똑똑히 보여줬소. 나와 뜻을 함께하겠다면 검을 맡아 주시오. 내게 믿고 맡

기는 건 말이 안 되니.”

 

기사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결론을 내렸다. “검을 드시오, 모그레인.” 트롤베인이 말했다. “곧 있을 전투에 당신이 필요

하오.”

 

나즈그림이 으르렁거리듯 동의를 표했다. “이런 날이 올 줄 다들 알았잖나. 함께하겠네.”

 

모그레인의 시선이 화이트메인에게 향했다. “당신은?”

 

화이트메인은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의논은 일단락되었다. 나홀로해낼힘이있었더라면. 죽음은 모그레인, 아니 모두에게서 강렬한 만화경처럼 빛나는

필멸자의 감정을 앗아갔다. 그들은 산 자처럼 사랑, 기쁨, 분노를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모그레인은 이 세 명의 기사들

과 등을 맞대고 아제로스 역사상 가장 큰 위협에 맞서 싸웠다. 그는 전투의 시련 속에서 이들의 흔들림 없는 영혼과 확고

부동한 마음을 알고 존경하게 되었다. 이들이 리치 왕의 4인 기사단으로 거듭난 것은 운명, 의무감, 그리고 단순한 우연

이 한데 어우러져 나온 결과인 셈이다.

 

4인 기사단은 함께 고통받았고, 함께 싸웠으며, 함께 승리를 쟁취했다. 병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유대를 이룬 그들이었

다.

 

그런 그들을 모그레인이 최후로 이끌고 있었다. 의문의 여지는 없었다. 리치 왕에 속박된 네 사람이 그를 타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기사는 없었다. 그런데도 망설임 없이 모그레인을 따라나선 것이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의 고서에 적혀 있던 문구가 불현듯 모그레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형제자매들이여. 나와함께전장으로가자. 나와

함께승리를쟁취하고, 빛의품으로진군하자. 모그레인은 동료들을 이 가망 없는 임무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유대감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예정된 결과였다.

 

“그럼 병력을 집결시키시오. 아케루스를 출정시킬 때요.” 모그레인이 말했다. “우린 노스렌드로, 얼음왕관으로 나아갈 거

요.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진군이 될 것이오.”

 

- - -

 

얼라이언스가다자알로를침공했다. 그들은잔달라의왕을시해하고물러났다. 길거리에는얼라이언스와호드를막론한수많은

전사의시신이즐비했다.

 

“명예로운최후를맞은이들의시체를가져오너라.” 이것이리치왕의명령이었다.

 

그래서그들은그말을실행에옮겼다. 아주조심스럽게.

 

다자알로는호드의영역이었기에나즈그림이선두에나섰다. 그는쓰러져간영웅들의무용담을수소문하며여러후보를선별했

다. 이러한작업은죽음의로아를피하기위한모든조처를한상태에서이뤄졌다. 다름아닌자신의영역에서망자를채가는걸알면

몹시노여워할것이뻔하니까. 나즈그림은성공가능성을그리확실하게점치진않았다.

 

다음행선지는쿨티라스였고, 그다음은어둠해안이었다. 큰싸움이있었던전장이란전장은모두찾아다녔다. 심연에서올라온어

둠의공포에맞서다쓰러진자들이있는가하면, 고향을위해싸우다전사한자들도있었다. 본래시신을매장하기로되어있던묘지

기나장의사를매수하여시신을회수할때도으레있었지만, 그외에는단순히지키는이없는무덤에서훔쳐내는방식이주를이뤘

다.

 

암울하고불온한과업이었다. 나즈그림은결국볼바르에게불만을토해내기에이르렀다. “죽은자는그냥고향땅에서선조들의영

혼과같이영면에들게하는게좋겠소.” 오크가호통쳤다.

 

리치왕의태도는요지부동했다. “다른자들의손이닿기전에내가차지하는것이다.”

 

다른자들이라고? 나즈그림은이에관해모그레인에게물었지만, 확실히모르긴그도마찬가지였다. “볼바르가실바나스윈드러

너를주시하고있나보오.” 대영주가추론을내놓았다. “그여자의의도를불신하는거겠지.”

 

실바나스를적대하는발상자체는나즈그림에게큰문제가안됐다. 따지고보면그의죽음에일조한장본인이기도했을뿐더러, 

신이따르는대족장도아니었다.

 

그렇게수집한시신은얼음왕관으로운반되어, 냉기가부패를차단하는성채지하의싸늘한저장고에안치되었다.

 

윈드러너가호드의수장자리에서내려오자리치왕은수집해둔시신을언데드로되살리기시작했다. 생기라곤찾아볼수없는시체

가하나씩움찔대다몸을떨었고, 기어이고통, 번뇌, 힘이합쳐진새로운존재가되어일어났다.

 

새로운죽음의기사들을맞이한리치왕의명령은단순했다. “죽음의힘이강해지고있다. 일어나라, 일어나서나의용사가되어라.”

 

나즈그림은신병들이새로운힘을다루는법을훈련하는데만해도몇년은걸릴것이라예견했다. 한데사실상모든인원을옛고향으

로돌려보내는게아닌가. 그렇게신병들은자신들을두려워하고경멸하는세상에서스스로길을개척해야만하는신세가되었

다. 갓들어온신병들에게살아남을방법을가르치려는시도조차하지않고전쟁터로내몰다니, 나즈그림에게는상상하기힘든일

이었다. 그러던어느날, 나즈그림은모그레인이그일과관련해볼바르에게따지는것을엿듣게되었다.

 

“하물며그아서스도새로들인노예에게훈련을시켰소.” 모그레인이말했다.

 

“나는아서스가아니다.” 볼바르가말했다. “그들은내노예가아니니라.”

 

“바로그거요.” 모그레인이말했다. “우린저주받았소. 하루도빠짐없이고통에시달리지. 우리가유일하게위안을얻는순간이바

로산자에게죽음과고통을안길때란말이오. 아서스의철통같은제어가없었더라면대부분이광분해날뛰었을거요. 신병중에는

바깥에서오래버티지못할자들도있소. 쓰러지기전에무고한이들을해칠지도모르오.”

 

볼바르의대답은싸늘하기이를데없었다. “그정도위험은감수해야한다.”

 

그러나몇주의시간이흐르면서다른무언가가나즈그림의심기를거스르기시작했다. 스컬지가얼음왕관성채로이끌리는듯한동

향을보이는까닭이었다. 죽음의기사들은내보내지고있었는데정작얼음왕관에머무는스컬지의대오는불어나고있었다. 나즈

그림은길잃은언데드몇마리가쌓인눈더미를파헤친뒤그안에들어가다시눈으로덮어몸을숨기는광경을처음으로포착했다. 

윽고그는눈에띄는족족눈더미를파헤쳐댔다. 아무것도안나올때도있었지만, 언데드무리가자신을올려다보는상황이펼쳐질

때가부지기수였다.

 

이들은넋나간언데드였다. 명령을받지않고서야이런행위를할이유가없는자들. 나즈그림의추궁에돌아온볼바르의답변은,

“네가신경쓸일이아니다”였다.

 

나즈그림은 이 사실을 다른 기사들에게 알렸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염려를 표했다. 볼바르는 왜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할

만한 언데드는 멀리 내보내면서, 알게 모르게 얼음왕관에 스컬지를 집결시키고 있는 걸까?

 

 

 

 

 

 

 

 

 

 

아케루스는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부서진 섬과는 이미 멀리 떨어져 별과 구름, 희미한 달빛을 받는 바다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행 요새가 움직인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상층부에서 큰 소리로 언데드 병력을 지휘하던 나즈그림은 수라마르

 샬도레이가 날아가는 요새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호기심에 잠겼다. 지금쯤 높은산 정찰대가 칠흑의 기사단이

움직인다는 보고를 오그리마에 올리고 있진 않을까 궁금했다. 나즈그림은 호드가 어떻게 대응할지 궁리했다.

 

머리가있으면방어병력을두배로증강하고침공에대비하겠지. 나즈그림이 골몰히 생각했다. 아케루스가 얼음왕관으로 돌아

가는 것은 백이면 백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스랄, 호드 의회 . . . 결정권자가 누구든 간에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나즈그림은 군단과의 전쟁 중 호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소문과 소식을 피하는 결단을 내렸다. 호기심이 동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너무나 동해서 걱정이 되었던 것이지. 그는 폭군 대족장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죽음의 기사

로 부활하고 나서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었다. 강철 호드. 군단의 귀환. 모두 헬스크림의 교만이 낳은 결과였

다. 나즈그림의 충성심이 낮은 결과이기도 했고.

 

그는 맹세를 지키고 죽었다. 호드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하나 그로 인한 결과가 끊임없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그래서 나

즈그림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4차 대전쟁 중, 적합한 . . . 신병을 찾아 호드의 영토를 정찰하던 나즈그림은 호드의 진통을 그냥 모르고 넘어가려야 넘

어갈 수가 없었다. 동포들이 또 다른 괴물을 타도하고 있건만, 도움을 주는 게 금지라니. 조금이나마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게 특이한 일이기도 했다.

 

나즈그림의 시선은 침묵에 잠긴 룬가열로로 옮겨겼다. 전투 전야에 그러하듯 타락한 보랏빛 불꽃으로 타올라야 할 룬가

열로는 고요했다. 세 명의 언데드 하수인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즈그림이 예전 목소리를 낼 준비를 했다. 장군의 목소리를.

 

“당장일하지못해?” 그의우렁찬목소리가터져나왔다. “내 검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네놈들이 불을 때고 가열로를 준비할 동

안 몇 시간 동안 기다리라는 거냐? 한 번만 더 일은 안 하고 자다 들키면-”

 

나즈그림이 말꼬리를 흐렸다. 세 하수인은 이미 나즈그림의 말이 아닌 의지에 지배되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보랏빛 불

꽃이 룬가열로의 용광로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즈그림의 말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거역자체가불가능한부하에게

명령을내지른다고한들무슨즐거움이있겠어. 그는 생각했다.

 

나즈그림이 고개를 돌렸다. 다른 할 일은 많았다.

 

아케루스 하층부로 내려오자, 토라스 트롤베인이 나즈그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네, 군주 나리.” 오크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툭 내뱉곤, 무릎을 구부리며 인간들이 소위 절이라고 부르는 동작을 흉내 냈다.

 

“저그저그, 장군.” 인간이 오랫동안 이어진 농담에 의무적으로 동참하듯 지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모그레인이 당신

을 찾으라 했소.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4인 기사단 중 누구도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하더군.”

 

“무슨 연유로?”

 

“행여 볼바르가 우릴 저지하려고 들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트롤베인의 말은 리치 왕의 존재감이 의식을 짓누르고 꼭두각시로 만들지도 모르니 대비하자는 의미였다. 나즈그림은

불만 섞인 신음을 뱉었다. 그런 상황을 면할 유일한 방법은 자제력을 잃기 전에 서로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뿐이었다.

노스렌드에서 숱한 스컬지를 처치한 경험이 있는 나즈그림의 머릿속에는 쓰러지기 전 스컬지의 흐리멍덩한 눈빛이 씻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자들과같은노예가되느니다시한번죽고말지. “볼바르가 정말 그렇게 나올 것 같나?”

 

“아직은.” 트롤베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예 시도할 생각조차 없을 수도 있소. 아직 얼음왕관과 거리가 가깝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볼바르가 정말 그 방법을 쓴다면 . . . 도끼를 휘두를 여력이 남아있다는 전제하에 날 끝내 주시오.”

 

“그전에 내 가슴에 검을 꽂아주면 약속하지.” 나즈그림이 인간의 팔뚝을 잡곤 꾹 움켜쥐었다. 스트롬가드의 병사들 사이

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우정의 몸짓이었다. 늙은 인간 국왕과 오크 장군은 예전 삶의 원한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다소 걸

리긴 했지만, 결국 진심을 나눈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나즈그림은 인간이 운영하는 포로수용소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생활

했고, 트롤베인은 그런 수용소의 오크를 모두 처형하란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트롤베인은 본인이 잘못했음을 인정할 의지가 있었다. 나즈그림은 트롤베인이 집권할 당시 백성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로 그러한 기질을 손꼽았다.

 

두 사람은 칠흑의 요새를 살피며 요새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수많은 병사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업무를 시찰했다. 마

침내 나즈그림은 밤새 그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흔들어 놓던 의문점을 드러냈다.

 

“볼바르를 처단한다고 치면, 누가 그를 대신해 투구를 쓰게 되는 겐가?”

 

“나도 모르오.” 트롤베인이 말했다. “그 왕관에는 관심이 없어서 말이외다.”

 

“자네 혼자만 살아남는다면?”

 

트롤베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하여간 그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건가?”

 

트롤베인은 걸음을 멈추고 나즈그림을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아제로스를 지키기 위해 할 일을 할 거요. 일단 승리에나

집중하시오. 우리 중 대부분은 살아남기 힘들 터이니.”

 

나즈그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볼바르는 얼음왕관에서 모그레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네.” 그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우리가 찾아와 자신을 끝내주길 바라는마음이 있는 걸지도. 순순히 당해줄지도 모르네.”

 

“가능성이야 있소.” 트롤베인이 나즈그림과 시선을 맞춘 채 이어 나갔다. “한데 전대 리치 왕은 고의로 가장 강한 전사들

을 왕좌로 불러들인 적 있지 않소? 그 덫을 탈출한 사람이 사실상없다던데.”

 

순간 나즈그림의 영혼에 불안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볼바르가모그레인을돌려

보낸건가? 자신의힘이가장강력한얼어붙은왕관으로 4인기사단전원을불러들여한꺼번에의지를강탈할속셈일까?

 

아니. 잠시 후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건 볼바르의 의도가 아닐 걸세.” 나즈그림이 말했다.

 

“확신에 찬 어조로군.”

 

“맞네.” 나즈그림이 말했다. “난 노스렌드에서 그의 전투 계획을 봤네. 같은 전략을 두 번씩이나 구사할 만큼 어리석은 사

람은 아니야. 특히나 앞서 한 번 실패한 전략을 말일세.”

 

트롤베인은 그 사실을 곱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로군. 근데 그렇다는 건 우리가 그의 계획에 대응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얘기잖소.”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즈그림의 불안은 하나로 응축되어 두려움이 되었다. 언데드로 되살아난 이후 공포에 가장 가까운

감정이었다. 모그레인이 볼바르 처단을 천명한 순간, 나즈그림은 네 사람 모두 리치 왕에게 소멸당할 것이란 걸 직감했

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앞서 전사한 경험이 있는 나즈그림이었으니. 훨씬끔찍한상황도있어. 그는 생각했다. 노예가 되는

것보단 망각이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나즈그림의 오장육부를 뒤틀어 놓은 건 바로 미지수였다. 필사적인 각오를 한 두 군대가 전대 리치 왕을 공격해 패배 직

전까지 몰렸었다. 그런데 전사 네 명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그들이 투구의 영향력에 취약하다는 건 모그레인이 이미

확인시켜줬다. 만일 4인 기사단이 실패한다면 . . . 지난 전쟁으로 갈가리 찢긴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군대가 일을 마무리

해줄 수나 있을까?

 

미지수. 불확실성. 나즈그림은 볼바르가 적이 아닌 것 같은 터무니없는 예감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불안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의 판단에 심각한 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회군을 제안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대면으

로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의문점이 해결될 테니까.

 

“망설이지 않고 죽일 수 있겠나?” 나즈그림이 물었다.

 

“난 아제로스를 지키기로 맹세했소. 볼바르가 아니라.” 트롤베인의 대답은 명쾌했다.

 

오크는 순찰을 속행했고, 트롤베인은 함께 움직였다.

 

아케루스 외부 발코니에 이른 두 사람의 눈에 북서쪽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들어왔다. 저 지평선 너머로 얼음왕관이 있

다. 나즈그림은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가린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등대처럼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하게 그 방향을 짚어

낼 수 있으리라. 모그레인이 돌아온 이후 나즈그림에게는 좀처럼 리치 왕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꼭 리치 왕이 완

전히 연결을 차단한 것 같았다.

 

물론 연결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을 뿐.

 

“우리가 가는 걸 알고 있을 테지.” 나즈그림이 사색에 잠겼다.

 

“그렇소.”

 

“자네는 나보다 더 많이 대화를 나눠 봤잖나.” 오크가 말했다. “볼바르가 정녕 실성한 게 맞는가? 구할 가망이 없는가, 이

말일세.”

 

트롤베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즈그림은 별말 없이 그가 생각을 정리하게 두었다. 끝내 트롤베인이 나직하

게 말했다. “볼바르는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의무를 짊어진 지도자요. 그 부담에 짓눌릴 때까지 홀로 버틸 심산이겠지.”

 

- - -

 

토라스트롤베인은얼어붙은왕좌앞에홀로섰다. 그위로펼쳐진얼음왕관성채의정점에는이글거리는안광을내뿜는지배의투구

와주위를에워싼푸른한기가자리하고있었다.

 

미지의심연처럼깊고깊은리치왕의목소리가트롤베인의심상에있는존재감을통해말을건네왔다. 그가언질을주는건몇주만의

일이었다. “물러나라, 트롤베인. 오늘네조언은필요없다.”

 

“그럴지도모르지.” 트롤베인이큰목소리로말했다. 그는굴하지않고계단을올랐다. “어쨌든할말은해야겠소.”

 

트롤베인이한걸음올라갈때마다볼바르의치밀어오르는분노가느껴졌다. 존재감을통해활짝열린상처처럼고동쳤다. 신중히

처신하라는의미였다.

 

트롤베인은생전의볼바르폴드라곤을몰랐다. 스트롬가드의국왕이었을당시, 결의와고결한성정으로자신의성기사스승들에

게강렬한인상을남긴소년폴드라곤에대한이야기를들은적있긴하지만말이다. 어느궁정행사에같이참석했을가능성이야있지

만, 결론적으로얘기를나눈적은없었다. 그가볼바르에대해아는것이라곤언데드로부활한이후어떤행보를거쳤는가그뿐이었

다. 볼바르는헌신적이고, 우직하며, 굳건한인물이었다. 성기사였을땐최고로손꼽혔으리라. 저주받은자의간수가되었다는

건본인의시련을구태여논하지않겠다는의미기도했다. 볼바르는고집스럽게혼자짐을짊어지려했다.

 

트롤베인은꼭대기까지몇걸음을남겨두고멈춰섰다. 계단의끝, 그림자가드리워진볼바르의왕좌에서고싶지않았다. 얼음이흡

사번데기처럼볼바르의두눈과불길로인해생겨난주황빛흉터로가득한육신을감싸고있었지만, 그래도왕좌에서희미하게기이

한불빛이뿜어져나왔다. 트롤베인은피부에맞닿은얼음이볼바르의혈관에흐르는용숨결을진정시키는효과가있는지궁금했

다. 더악화시킬가능성도배제할순없었다.

 

“볼바르.” 트롤베인이운을뗐다. “우린당신의하인이아니오. 우리를그렇게대하는건이제그만하시오.”

 

볼바르의존재감으로전해지는노여움에맞춰얼음아래주황빛섬광이번뜩였다. “그래, 모그레인이보냈나보군.”

 

“아니. 다만당신의탈선에대해가감없이얘기해주더구려.”

 

곧바로냉기가뿜어져나왔다. “그에게할말은없다. 너에게도.”

 

“우리를믿고되살려 4인기사단으로만든건당신이오.” 트롤베인이말했다. “우리역시당신을믿어야하지만, 계속비밀을감추면

어쩌자는것이오.”

 

분노가한층강해졌다. “무엇을털어놓으란건가?” 볼바르가물었다.

 

트롤베인이손을펼쳐차분하게손짓했다. “이곳에군대를모으고있잖소. 당신이장기말을움직이는건우리모두알고있소. 문제

는그목적을모르겠다는거요. 계획을알려주시오. 그럼협조하리다.”

 

“죽음을면치못할거다. 그럼내게도움이안돼.” 볼바르가마치자식에게질린듯한아버지처럼경멸을담아말했다. 트롤베인으로

선참으로, 참으로오래간만에느껴보는감정이었다.

 

“준비되지않은병사를전장에내보내면당연히죽을수밖에없소.” 트롤베인이수긍을드러냈다. “우리가준비되지않은건자명하

오. 무슨변화가있었던거요? 어떤세력때문에우릴이리도억제하는것이오?”

 

“실바나스윈드러너.”

 

토라스트롤베인은머뭇거렸다. 윈드러너? 4차대전쟁이발발한이후로리치왕이그녀에게관심을두긴했다. 4인기사단에실바

나스윈드러너의행방에대한소문을들으면보고하되, 독단으로뒤쫓는행위는절대엄금한다는명령을내릴정도였으니. 하지만

실바나스가투구에경멸감만을드러냈다는얘기해준것도볼바르였다. “그여자얘기는왜하는것이오?”

 

“그여자가일으킨전쟁이생명과죽음의균형을뒤집어놓았다. 투구의힘이요동치기에이르렀노라.” 볼바르가 말했다. “군단이

우리네세상을하나의거대한무덤으로만들때도이런감각은느끼지못했다.”

 

트롤베인은무엇이볼바르를불안하게만들었는지여전히확신이서지않았다. “실바나스가뭘어쩌려고했는지는모르겠지만이

미실패했소.”

 

트롤베인에게 맹렬하게 타오르는 볼바르의 분노가 전해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볼바르 자신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있

었다. “그 여자가 실패한 흔적이 네 눈에는 보이더냐?”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아침노을을 가렸지만, 새벽의 흐린 빛이 이제 막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용의 안식처 해안의 절

벽과 바스러지는 폐허를 드러냈다. 얼음왕관 성채를 눈에 담으려면 앞으로 몇 시간은 더 걸릴 터였다.

 

샐리 화이트메인은 조심스러운 곁눈질로 다리온 모그레인을 살폈다. 그는 퉁명스럽게 아케루스 병력에 명령을 내리며

밤새 공성전을 준비했다. 그런 다음 지금은 눈 하나 까딱 않고 노스렌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래도 고심에 잠긴

모양이었다.

 

이래서는안되겠어. 화이트메인은 결심을 세웠다. 무시무시한 과업을 앞둔 이 마당에 모그레인이 엄한 데 정신을 팔았다

간 폴드라곤의 지배에 취약해질 수도 있다. “전대 리치 왕에게 꼭두각시로 부려질 땐 어떤 느낌이었죠?” 그녀가 물었다.

 

모그레인이 고개를 들어 화이트메인을 응시했다. “그 감각을 알 일이 없기를 기도하시오.”

 

“끔찍한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화이트메인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폴드라곤은 우리가 오는 것을 알

아요. 의지를 빼앗으려고 들거든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단 얘기죠. 희망의 빛 예배당에서 어떻게 아서스의 제어에서 벗어난

건가요? 어떻게 자유를 지켜낸 거예요?”

 

대영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난 성지에서 자유를 얻었소. 정의로운 분노가 있었기에 아서스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성을

지킬 수 있었다오.”

 

“그럼 빛과 분노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지금 그 두 가지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요?” 질문을 던진 화이트메인의 목소리

에는 날이 서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그레인의 분노를 끌어내려는 의도에서였다. 화이트메인은 언데드로 되살아난 이

후로 증오의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일생을 언데드 박멸에 바친 끝에 정작 그중 하나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잔인한 모순

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화이트메인은 책무를 받아들였다. 사사로운 불쾌감에 얽매이지 않고 어둠의 힘으로 아제로스를

지켰다. 모그레인이 얼마나 복잡한 심경이든 본인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늘 빛의 도움을 구할 생각은 없소, 죽음의기사여. 최후의 수단이면 모를까.” 모그레인이 차갑게 말했다. “진실로 행운

이 따라준다면 빛이 그 타락한 살점을 잿더미로 만들어 호응해줄 것이오. 단언컨대 쾌적한 죽음은 아닐 테지.”

 

화이트메인은 이 또한 모그레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걸 알았다. “전 대영주 당신이 못 미덥습니다.” 그녀가 말

했다. “볼바르를 죽이려는 순간 흔들릴 것 같거든요.”

 

모그레인의 눈길이 다시 탁자로 향했다. “그러는 당신은 그를 손쉽게 죽일 수 있나 보오?”

 

화이트메인의 사라졌던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리치 왕을 처단하는 게 소원이라던 제 말이 농담으로 들렸나요?”

 

“천만에.” 노스렌드 지도를 재차 살핀 모그레인이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볼바르에게 분노한 감정 같은 건

없소. 후회만 가득하지. 그래도 의무를 소홀히 하진 않을 것이오. 그에게 약속한 게 있으니.” 그가 말했다.

 

바로 그때, 모그레인의 눈이 갑작스럽게 휘둥그레졌다. “이 무슨?” 그가 입을 열었다.

 

화이트메인은 그 직후 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한 존재감이, 그녀와 리치 왕을 잇는 연결이 휴면을 깬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나마 불길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아니, 화이트메인이 느낀 건 열기가 아니었다. 동상의 작열하는 한기가 서

서히 리치 왕의 존재감을 에워싸고 있었다.

 

무슨일이일어나고있어. “대영주, 이건 혹시?”

 

“그렇소.” 모그레인이 말했다. “이게 바로 아서스가 느꼈던 감각이오. 투구의 힘이지. 볼바르가 더는 억제하지 못하고 있

군.”

 

“타락해버린 건가요?” 화이트메인이 물었다.

 

“맞소.” 모그레인이 말했다. 애통해하는 모그레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화이트메인의 귓가에 들렸다. “볼바르, 이해가 안

되는구려 . . .”

 

빛이시여, 나도느껴져. 화이트메인이 생각에 빠졌다. 볼바르가 타락을 부르는 언데드의 저주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다시

말해 생명의 정수 그 자체를 탐하는 굶주리고 열성적인 부패의 강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화이트메인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당장리치왕의목숨을거둬야한다. 그의 힘이 머릿속 존

재감을 통해 스며들어, 차가운 유리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화이트메인의 심상을 타고 부서진 영혼에 뚝뚝 떨어지는 희

미한 감각이 들었다. 이 상황이 며칠이나 지속됐다간, 설령 볼바르가 자기의지로 보호하려고 들더라도 4인 기사단은 그

의 뒤를 따라 자아를 잃고 말 것이다.

 

엄숙하게 굳은 모그레인의 표정을 본 그녀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드디어. 화이트메인은 생각했다. 대영주가전투에임할

각오를다졌군.

 

그는 노스렌드를 잠시 내다 보곤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보호갑을 두들겼다.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소.” 그가 말했다. “돌

아갈 길은 없소. 해가 질 때까지 볼바르를 리치 왕으로서 그냥 두면 막지 못하게 될 것이오.”

 

격앙된 모그레인의 목소리가 아케루스 사방에 반향을 일으켰다. “아제로스를 위하여! 산 자를 위하여! 그리고 서로를 위

해. 우린 진군해 볼바르를 처단하리라.”

 

- - -

 

하루전의일이었다. 다리온모그레인은무거운마음으로검을뽑아든채얼어붙은왕좌에다가갔다.

 

“볼바르.” 모그레인이그를불렀다. “할말이있소. 지금당장.”

 

대답은돌아오지않았다. 성채꼭대기에서혹한의돌풍이몰아쳐모그레인의방어구에낀성에를날려버렸다. 그는볼바르를향해

첫걸음을내디뎠다. 리치왕이자신을바라보는지는알수없었다. 볼바르를감싼얼음은평소와달리투명하지않았다.

 

“볼바르, 내약속했잖소.” 모그레인이또다시한발짝을내디뎠다. “기억하시오?”

 

여전히묵묵부답의연속이었다. 볼바르는그를바라보지않았다. 슬픔이모그레인의목청까지치밀어올라왔다. 언데드가 되어

간직한 감정이 하필이면 슬픔이라니. 모그레인의생각은한으로가득했다. 그는등반을이어나갔다.

 

“아서스처럼변하게두지않겠다고맹세했잖소.” 이렇게또한걸음.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오, 볼바르. 모그레인은생각했다. 

도 이러고 싶진 않거늘.

 

모그레인은다시한발짝내딛다넘어질뻔했다. 자그마한물줄기가그의장화를지나계단을타고흐르고있었다.

 

모그레인은당최이해가안됐다. 이건어디서흘러나오는거지?

 

그는마지막남은몇개의층계를다급하게올라갔다. 장화를내디딜때마다물이철벅튀었다. 그렇게그는얼어붙은왕좌바로앞에

서, 두눈을크게뜬채로멈춰섰다.

 

리치왕을감싼얼음이녹아내리고있었다. 대략 3분의 1은이미사라진뒤였다.

 

“볼바르.” 모그레인이속삭였다. “대체무슨짓을벌이는것이오?”

 

마침내, 볼바르의주황빛시선과눈이맞았다. “혼자오다니어리석기이를데없구나, 모그레인.”

 

맞는 말이다. 얼어붙은왕좌에오면서모그레인이바란것은최후통첩에대한볼바르의응답이었지, 왕좌를벗어날준비를하는리

치왕은아니었다.

 

내가 때를 재는 데 너무 시간을 썼구나. 모그레인은생각했다. 더끔찍한것은, 그로말미암아볼바르가움직일지도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신이투구의유혹에굴복한건아닌지확인해야겠소.” 모그레인이말했다. “저주받은자의간수로서몇년을버텼으니말이오.”

 

“그래서내가굴복한것같나?” 볼바르는차분했다. 너무나도차분했다. “나는투구의힘을견제하느라그용도를깨닫지못하고있

었다.”

 

용도? “그용도가뭐든미리차단할수있도록돕겠소. 하나어떤이유에서건투구의힘에굴복하면아니되오, 볼바르. 그결과를잘

알잖소.”

 

“죽은자의군대가세계를파괴하고남은불모지를행군하겠지. 아제로스에생명이설자리는사라질것이고.”

 

“정확하오.” 모그레인이속삭였다.

 

“그걸누가막는단말인가, 대영주여?”

 

“난이미리치왕과싸워봤소.” 모그레인이말했다. “한명더상대할힘은남아있다오.”

 

리치왕의존재감이음산한웃음을흘렸다. “모그레인, 오늘밤나를죽이고자리를찬탈할생각이라면얼마못가실각할것이야.”

 

그게무슨의미지? “이젠날조롱하는거요? 당신투구나왕좌따위에는관심없소. 수많은인명이위험에내몰릴일만없었어도내친

히이저주받은성채와그안의생물을모조리없앴을거란말이오.” 모그레인이팔짓으로얼음왕관을둘러싼요새전경을가리켰다.

“내가도와주겠소. 우리 4인기사단은어떤짐이든함께짊어질수있소.”

 

“죽을것이다. 너희네명모두.”

 

“그럼죽으면되잖소!” 모그레인이고함쳤다. “우리중에또죽는걸두려워할사람이있을것같소? 우린아제로스를위협하는적이

라면누가됐든진군할것이오. 쓰러지면백배로보복하면될일.”

 

“그래, 그러길빌지.” 리치왕이말했다.

 

리치왕의머리를감싼얼음에균열이생겼다. 볼바르의안면부터목에이르는자그맣고삐뚤빼뚤한틈새가열린것이다. 커다란얼

음덩어리가모그레인의발치에떨어져작은수정이산산이조각나더니, 이내바람에휩쓸려날아갔다.

 

모그레인은신경이바짝곤두섰다. 볼바르의목을감싼얼음에빈틈이생겼다. 정확한 일격으로 꽂아 넣으면 . . .그것이모그레

인의생각이었다.

 

하지만어딘가이상했다. 마치볼바르가해볼테면해보라는듯도발하는것같았다. 모그레인은잠시눈을감고머릿속을정리했다.

 

그리고검을휘두르기로결심했다.

 

그러나근육이채꿈틀대기도전에리치왕의존재감이먼저반응했다. 모그레인은갑작스럽게몸이굳었다. 볼바르의의지가그를

멈추게한것이다.

 

정신속에서모그레인은과거아서스의사슬을풀어낸때처럼볼바르를떨쳐내고자난폭하게몸부림쳤다. 그리고통했다. 무언가

가물러났다. 볼바르가모그레인의영혼을더옥죄기엔무리가따른모양이었다.

 

모그레인은머뭇거리지않고볼바르의목에검을휘둘렀다.

 

존재감이비집고들어왔다. 검이모그레인의손에서떨어졌다.

 

얼음과물이뒤섞인왕좌바로앞바닥에무기가떨어지자절망이모그레인을덮쳤다. 리치왕의존재감은강철보다단단한결속으로

모그레인이란존재를볼바르에게구속하고있었다.

 

난 실패했구나.

 

“검을집어라, 모그레인. 필요하게될테니.” 리치왕의존재감이모그레인을완전히지배하기에이르렀다. 그는투구가만들어낸

감옥에갇혀스스로움직이거나말할수없었다. 그는가볍게검을들어원래위치로집어넣었다. “이제걸어라.”

 

모그레인의발이명령에응했다. 존재감은강제로얼어붙은왕좌에서발을돌려계단을내려가게했다. 볼바르는, 아니모그레인은

볼바르의무언의의지에따라아케루스로통하는죽음의관문을소환했다. “내가마음만먹으면널도구로만들어돌려보낼수있

다. 나머지세기사가기다리고있을테지? 그치들의손에죽기전까지몇명이나벨수있겠느냐?”

 

아련하게나마희망이떠올랐다. 그렇게 해. 날 돌려보내. 모그레인이생각했다.

 

볼바르는그의의중을읽었다. “그렇군. 지금널기다리는모양이지. 화이트메인은네가자아를잃고돌아올가능성을상정하고있

고말이야. 그럼대비도되어있겠지. 좋다.”

 

죽음의관문이활성화되었다. 짙은보랏빛안개기둥이솟아나모그레인보다조금큰피라미드형상을이뤘다.

 

존재감은강제로모그레인을관문너머로보냈다.

 

“홀로돌아오지마라, 모그레인.” 볼바르가말했다. “너희 4인기사단모두가와야지만투구를가진자를처단할가망이생긴다. 

가라.”

 

모그레인은아케루스로통하는관문을지나왔고, 그의뒤로안개가사라졌다.

 

그와동시에볼바르의지배가풀렸다. 존재감은다시잠잠한침묵에빠져들었다. 공격할적기를노리는살모사처럼그의영혼속에

잠복한것이다.

 

모그레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유를 찾은 그였지만, 어느 때보다 강렬한 막막함이 느껴졌다.

 

 

 

 

 

때가 임박했다.

 

그전에 앞서 4인 기사단은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볼바르가 즉각 투항해 투구를 벗지 않으면 아케루스에서 그의 병력에

폭격을 퍼부어 4인 기사단이 직접 리치 왕 본인을 맹습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작전이었다.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몇

명이나 리치 왕의 지배에 저항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되는사람이 있긴 할는지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존재감에 변화가 찾아왔다. 거리가 가까웠던 만큼 볼바르의 영향력을 더 강력하게 받는 상태였다. 얼음왕관 성채에

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던지라 맨눈으로 얼어붙은 왕좌를 보기엔 어려움이 따랐지만, 하늘의 구름이 개면서

그 위협적인 형체를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그런 그들의 심상 속에서 어떤 광경이 보였다.

 

먼저 느낀 건 모그레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낯선 광경이 번쩍 나타났다. 볼바르의 스컬지 중 하나가 검은 기운에 감싸

인 화살이 박힌 채 털썩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몇 분 후, 얼어붙은 왕좌 앞에 십수 마리의 스컬지가 널브러졌다. 이윽고

또 다른 십수 마리가 쓰러졌다.

 

얼음왕관에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사단은 존재감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볼바르가 보여주고 있었다. 4인

기사단은 아케루스에서 침묵에 잠긴 채 멀리 떨어진 첨탑을 바라보았다. 잠깐 시간이 흐르자 심상은 한층 명료해졌다.

 

화이트메인이 느닷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윈드러너예요. 볼바르가 실바나스윈드러너와 싸우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모그레인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빛나는 눈. 생긴 지 얼마 안 된 얼굴 흉터까지. 영락없이 실바나스였

다. 투구를 빼앗으러 온 것이다.

 

모그레인은 불현듯 깨달았다.

 

“너희 4인기사단모두가와야지만투구를가진자를처단할가망이생긴다.” 볼바르가 한 말이었다.

 

투구를 가진 자를 처단해라. 내가아닌. 투구가 더는 그의 것이 아니기에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실바나스가올줄알았군. 모그레인의 깨달음이었다. 볼바르는 실바나스가 투구를 빼앗으러 올 것을 예견했다. 그 여자가

리치 왕의 힘을 손에 넣으면 단순히 억누르려고만 하지도 않을 테니 투구를 사용해 저지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고.

 

하나 볼바르는 그로 인한 결과를 알았다. 투구를 사용함으로써 찾아올 결과는 단 하나였다. 세계의 죽음. 한번 힘을 받아

들이는 순간 볼바르가 타락에 한 달, 일주일, 일 분을 저항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결국 아제로스의

몰락이라는 결과로 귀결될 테니까.

 

그런데 아제로스를 지키기로 맹세한 4인 기사단이 실바나스와의 전투로 약해진 볼바르를 저지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물며 실바나스가 이기더라도 투구의 힘을 능숙하게 다루진 못할 테니, 잠시나마 취약해지는 순간이 생길 터였다.

 

볼바르는 자신의 군림이 끝날지도 모르는 정확한 시기에 맞춰 모그레인과 기사들을 도발해 자기 목숨을 거두러 오게 했

다. 그러면서도 지배력에 휘둘리지 않게끔 죽음의 기사 신병 전원과 거리를 둬서 격리했다. 다시 말해 누가 승리하든 4인

기사단에게 승산은 있도록 안배한 셈이다.

 

트롤베인이 모그레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 역할에 변화가 생기는 건가?” 그가 물었다.

 

모그레인이 기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변하는 건 없소. 우리의 의무는 그대로요.” 그리곤 다시 얼음왕관을 내다

보았다. “볼바르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소. 자신이 이기거나, 아니면 새로운 리치 왕이 탄생하거나.”

 

“이번엔 여왕이겠군요.” 화이트메인이 말했다.

 

“그렇소.” 볼바르, 날믿고미리언질을줬더라면얼마나좋았을까.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모그레인이라면 그와 함께 실바나

스와 싸우겠다며 아집을 부렸을 것이다. 다른 기사들도 똑같았겠지. 얼어붙은 왕좌에 널브러진 시체로 미루어 보건대, 그

렇게 됐으면 4인 기사단이 전멸했을 것이다. “볼바르는 우리를 유인한 거요. 전투가 끝난 뒤 남을 승자를 마무리하도록.

실바나스가 스컬지 무리를 돌파하고 우리 의지를 지배할 방법을 터득하기 전에 말이오.”

 

나즈그림이 잠시 고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우리 중 한 사람이 그를 대신해야겠군.”

 

그 말을 끝으로 오랜 침묵이 계속됐다. 화이트메인은 책무에 자원할 동료는 없는지 보려는 듯 기사단 한명 한명을 힐끗

거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벼락 같은 소리에 기사단의 이목이 다시 얼음왕관에 몰렸다. 존재감이 전율했다. 볼바르의 차갑게

더럽혀진 결의는 처절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모그레인은 볼바르의 마음의 눈을 통해 명료하게 볼 수 있었다. 실바나스가 그의 머리로 팔을 뻗고 있었다.

 

연이어 고통이 찾아왔다. 모두가 고통에 휩싸였다. 두개골을 뚫고 칼날이 꽂히는 듯한 격통이었다. 모그레인은 탄성과 함

께 지휘의 광장 반대편으로 투구를 내팽개친 다음,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힘껏 누르며 고통을 짜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

나 다른 이들의 막연한 절규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잠시 후, 고통이 갑작스럽게 끊겼다. 모그레인은 안도감에 머리를 감싼 채 무릎을 꿇을 지경이었다. 일행이 다시 말을 꺼

낼 수 있기까지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존재감이 어디로 갔지?” 나즈그림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그레인은 이해가 안 됐기에 대답을 아꼈다. 그저 고통의 부재를 만끽했을 뿐. 참으로 황홀했다.

 

“볼바르는 어딨는 게지?” 오크가 다시 물었다. “그가 안 느껴지네.”

 

과연 그 말대로였다. 볼바르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아니, 모그레인은 깨달았다. 사라졌다기보단그자리가비어있었다. 지배

의 매개체는 그대로 있었다. 다만 . . .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아서스가 패배한 이후 그랬던 것처럼.

 

“실바나스가 투구를 빼앗았군.” 모그레인이 말했다. 그가 다른 이들과 시선을 맞췄다. “이제 그 여자가 표적이오.”

 

화이트메인이 코웃음 쳤다. “알겠습니다.”

 

“볼바르는 어떻게 된 거지?” 나즈그림이 웅얼거렸다.

 

트롤베인이 모그레인을 바라봤다. “볼바르는 이제 리치 왕이 아닐 것이오. 될 수 있으면 구하는 게 좋곘소.” 트롤베인이

말했다.

 

“동의하는 바요.” 모그레인이 호응했다.

 

그는 트롤베인 너머에 있는 아케루스의 언데드 병력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이 가만히 있었다. 정신이 있는 이들은 멍한 얼

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허공을 응시하다 움찔대기 시작했다.

 

리치왕은언제나존재해야한다.

 

얼마 안 있어 아케루스의 병력 대부분과 노스렌드의 스컬지 잔당이 이성을 잃고 매서운 폭력에 의지하는 상태로 돌아갔

다. 실바나스가 투구를 썼다면 아케루스의 접근을, 4인 기사단의 의도를 감지했을 것이다. 모그레인은 실바나스가 4인 기

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의지를 지배하러 들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지배에실패하더라도 4인기사단은실바나스가부리는스

컬지를돌파해야한다.

 

모그레인이 비행 요새의 심부를 가리켰다. “지금 얼음왕관과의 거리 정도면 아케루스 병력에 대한 통제권을 간신히 유지

할 수 있을 거요. 다들 준비시키시오. 이게 유일한 기회-”

 

그 순간 모그레인은 말을 멈췄다. 입은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의 존재감이 변화하고있었다. 이번에는

고통이 뒤따르지 않았다. 전혀. 모그레인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아서스가 쓰러졌을 때도 이런 감각은 없었다.

 

지배력과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인 존재감이 허물어져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모그레인은 이해가 안 됐지만 . . . 해방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속박하던 사슬이 하나씩, 하나씩 풀리는 것만 같았다. 모그레인은 자신이 이렇게나 강렬한

지배하에 있었는지 눈곱만큼도 몰랐다.

 

나즈그림이 갑자기 소리쳤다. "저게 무슨 짓이지?"

 

모그레인의 시선이 얼음왕관으로 향하는 순간, 하늘이 산산이 조각났다.

 

충격파가 아케루스를 강타했고, 모그레인은 일순간 발을 헛디뎠다. 비행 요새가 허공에서 크게 흔들릴 동안 나즈그림이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안정!” 모그레인이 외쳤다. “아케루스를 안정시켜야 해!”

 

소수의 병사가 그의 명령에 반응했다. 요새는 하늘에서 떨어질 것처럼 흔들리더니 결국 균형을 되찾았다. 이들에게 안도

의 한숨을 내쉴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위치를 사수하게!” 나즈그림이 소리쳤다. 그는 숙련된 시선으로 지평선을 훑으며 모든 상황을 확인했다.

 

모그레인은 얼음왕관을 응시했다. 성채 위의 푸른 하늘은 사라지고없었다. 산산조각이 나 있었으니까. 그는 짙은 검은 안

개에 감싸여, 벼락처럼 번뜩이는 황갈색 광채로 희미하게 빛나는 어둠의 영역을 골똘히 주시했다. 곧이어 또 다른 구조물

이 안개를 뚫고 얼음왕관 성채 바로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켜보던 모그레인은 존재감이 진정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투구가 파괴된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로 말미암아 . . .

 

“삶과 죽음의 장막.” 모그레인이 가쁜 숨을 쉬었다. “그 여자가 장막을 부쉈어.”

 

모그레인은 볼바르의 끔찍한 실수를 인지했다. 그는 실바나스의 목적이 투구를 빼앗는 데 있다고 판단했다. 파괴가 아니

라. 그런데 무슨 수로 알았을까? 투구를 파괴하면 저런일이 펼쳐질 줄 어떻게 안 거지?

 

모그레인의 뒤쪽으로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무거운 물체에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서 났

다.

 

“대영주, 무기를 꺼내시오.” 트롤베인이 외쳤다.

 

모그레인은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기를 뽑아 들었다. 무언가가 부딪히기에 그는 눈썹을 치켜들고 시선을 돌렸다. 아

케루스의 병사 중 하나가 모그레인의 방어구를 할퀴며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병사를 베어 넘겼다. 주변에는 이미 몇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스컬지를다스릴리치왕이사라졌다. 마침내 모그레인은 깨달았다. 

 

 

 

빛의뜻에따라다신일어나선안될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모그레인은 행동에 나섰다. 전당에서 급작스럽게 폭주한 병사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므로 4인 기사단이 빠르

게 처리할 수 있었다.

 

모그레인은 지휘의 광장의 다른 부분을 살핀 후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혼돈 속에 명료함이 피어나는 법. 그가 먼 옛날

터득한 사실이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한번에하나씩수습하면된다.

 

 

 

“난 실바나스의 다음 계획을 모르지만, 볼바르라면 알지도 모르오. 그가 필요하오.” 모그레인이 말했다. “화이트메인, 나

즈그림. 얼음왕관에 도착하려면 한 시간은 더 가야 하오. 도착하면 둘이서 볼바르를 찾으시오. 살아있으면 데려와 주시

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그레인은 트롤베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우린 아케루스를 확보합시다. 통제

되는 이들은 지배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처리할 거요.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 . . . 최대한 많이 구해야 하오.”

 

“알겠소.” 트롤베인이 말했다. 두 사람은 요새의 심층부로 들어갔다. 곧이어 그들 무기의 노랫소리가 노스렌드의 얼음 바

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 - -

 

나즈그림과 하강하는 와중에도 화이트메인의 시선은 얼어붙은 왕좌에 꽂혀 있었다. 그 위의 산산조각 난 하늘은 안중에

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나중에 해결할 문제였다. 그녀는 실바나스가 아직 남아있는지 세심히 둘러보았지만 밴시 여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오크가 먼저 도착해 얼어붙은 왕좌의 잔해로 도약했다. 바로 이어서 착지한 화이트메인은 쏜살같이 나즈그림을 제치고

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스컬지 시체들을 피해 움직였다. 그녀는 단상 중심에 몸을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볼바르를 발견했

다.

 

볼바르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이트메인은 그런 그가 이해됐다. 그녀는 곁에 무릎

을 꿇고 앉아 그의 목을 받쳐주며 물었다. “그 여자는 떠난 건가요?” 화이트메인이 물었다.

 

볼바르는 말하기도 힘겨운 상태로 보였다. 화이트메인은 부상 때문이라기보단, 볼바르 본인이 막아내는 데 실패한 초월

적인 규모의 재앙 때문이라 짐작했다.

 

“그래, 실바나스는 떠났다.” 그의 목소리는 회한과 죄책감으로 가득했다. “나는 몰랐다. 꿈에도 몰랐-”

 

나즈그림이 볼바르 곁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제 아케루스로 돌아갈 것이오.” 그가 말했다. “할 일이 태산이오.” 나즈

그림과 화이트메인은 힘을 합쳐 볼바르를 부축했다.

 

볼바르가 화이트메인의 어깨 방어구를 꽉 쥐었다. “실바나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나?”

 

“모르오. 안전해지는 대로 얘기해 주시오.” 나즈그림이 말했다. “다음에 뭘 하면 되는지도 알려주면 좋겠구려.”

 

볼바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나는 이제 리치 왕이 아니다.” 그가 말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화이트메인이 볼바르의 팔을 어깨에 둘러 받쳤다. “리치 왕을 죽이려고 이 먼 길을 행차했는데. 도

착하자마자 왕위에서 내려오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내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볼바르가 말했다.

 

“당연한 소리를.” 화이트메인이 입을 샐쭉했다.

 

나즈그림 역시 웃고 있었다. “승리를 위해 스스로 죽을 준비를 했잖소. 록타르오가르. 으흠. 따를 테니 우리의 칼날을 이

끌어 주시오.”

 

볼바르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뜨자 화이트메인은 결의를 엿보았다. 훌륭하군. 그녀는 생각했다.

 

볼바르는 산산이 조각나버린 지배의 투구 파편을 가리켰다. “저것들을 모아라. 조심해야 한다. 꼭 필요한 것들이니.”

 

나즈그림이 파편을 모을 동안 화이트메인이 홀로 볼바르를 부축했다. “다음 행보는 뭐죠, 대영주?”

 

볼바르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맹이 필요하다. 그것도 최대한 많이. 그런 다음 죽음의 검은 심장으로 진격할 것

이야.”

 

“좋네요.” 화이트메인이 말했다. “쉽게 끝날까 봐 걱정하던 차였는데.”

 

 

 

Robert Brooks

 

 

 

 

 

어둠의 땅 죽음의 기사 스토리 요약

격전의 기간동안 4인 기사단이 볼바르의 명령으로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전사자들 죽음의 기사로 부활시키고 그동안 볼바르는 스컬지를 얼음 왕관에 집결시킵니다.

그러자 4인 기사단은 볼바르 타락을 의심해서 모그레인이 직접 가서 확인해본 바로 볼바르가 타락하기까지 얼마 안남은걸 확인합니다. 그리하여 볼바르를 타도하기 위해 4인의 기사단은 얼음왕관으로 이동합니다.

 

이 모든 것은 볼바르는 자신이 타락하기 직전 인 것과 실바나스가 리치왕의 투구 빼앗으러 올 것을 예상하고 4인기사단을 유도한 것 이였습니다. 자신이나 실바나스 중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를 4인 기사단이 죽임으로써 타락 직전인 자신과 실바나스 둘 다 제거하려는 계획이였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힘이 충만한 실바나스는 너무나도 강력하였으며 볼바르를 압도하고 리치왕의 투구를 부셔버렸습니다.

죽음의 기사단과 볼바르는 동맹을 모아 실바나스를 저지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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